3 당한 만큼 칼춤을 추리라
劍舞에 대한 認識
검무는 “칼을 휘두르며 추는 춤”으로 劍技舞 또는 칼춤이라고도 한다. 이 춤에 대해 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李瞻의 고증을 인용하여 매우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전하고 있으며, 이밖에도 東京雜記와 增補文獻備考에도 내용이 간략히 소개되어 있다. 기록에 의하면, 신라 소년 黃昌이 백제에 들어가 칼춤을 추다가 백제의 왕을 죽이고 자기도 죽자, 신라인들이 그를 추모하기 위하여 그 얼굴을 본떠 가면을 만들어 쓰고 칼춤을 추기 시작한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춤은 樂學軌範에 수록되지 않아 이미 조선초기에는 성행하지 않은 듯하다. 다만 숙종 때 金萬重의 「觀黃昌舞」라는 칠언고시에 의하면 기녀들에 의하여 가면 없이 연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중기 이후의 「公莫舞」와 「尖袖舞」는 검무의 한 갈래이고, 순조 이후의 進宴儀軌 進饌儀軌 進爵儀軌 등에 검무의 무도가 전하고, 한말 呈才舞圖笏記에는 그 무보가 전한다. 경술국치 이후 관기제도가 폐지되었고, 조선 말기 궁중 進宴과 유대를 맺고 왕래가 있었던 각 지방 교방청이 설치되었던 지역에는 궁중 계열의 정재가 잔존해 있듯이, 검무도 각 도마다 남아 있었다. 그런데 현재 비교적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진주의 검무이다.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었다.
이러한 내용으로 볼 때 검무에 대한 자료는 황창무에 관한 것을 빼고는 거의 드문 편이며, 더구나 진주 검무에 대한 작품은 시와 문을 막론하고 전혀 소개된 바가 없는 듯하다. 그렇다면 다산이 촉석루에서 연유할 때 검무를 추는 기녀를 보고 지은 36구의 비교적 장편시에 달하는 「칼춤시를 지어 미인에게 주다[舞劍篇贈美人]」이라는 시는 우리 나라 검무에 관한 자료로서, 더 나아가 진주검무에 관한 중요한 자료로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시 전편을 보기로 한다.
계루고 한 소리에 풍악이 시작되니, 鷄婁一聲絲管起,
넓디넓은 좌중이 가을 물처럼 고요한데, 四筵空闊如秋水.
진주성 성안 여인 꽃 같은 그 얼굴에 矗城女兒顔如花,
군복으로 단장하니 영락없는 남자 모습. 裝束戎裝作男子.
보라 빛 쾌자에다 청전모 눌러 쓰고, 紫紗褂子靑氈毛,
좌중 향해 절한 뒤에 발꿈치를 들고서, 當筵納拜旋擧趾.
박자 소리 맞추어 사뿐사뿐 종종걸음, 纖纖細步應疏節,
쓸쓸히 물러가다 반가운 듯 돌아오네. 去如怊悵來如喜.
나는 선녀처럼 살짝 내려앉으니, 翩然下坐若飛仙,
발 밑에 번쩍번쩍 가을 연꽃 피어난다. 脚底閃閃生秋蓮.
몸 굽혀 거꾸로 서서 한참 동안 춤추는데, 側身倒揷蹲蹲久,
열 손가락 번득이니 뜬구름과 흡사하네. 十指翻轉如浮雲.
한 칼은 땅에 두고 한 칼로 휘두르니, 一龍在地一龍躍,
푸른 뱀이 백 번이나 가슴을 휘감는 듯, 繞胸百回靑蛇纏.
홀연히 쌍칼 잡자 사람 모습 사라지니, 倏忽雙提人不見,
삽시간에 구름 안개 허공에 피어났네. 立時雲霧迷中天.
전후 좌우 휘둘러도 칼끝 서로 닿지 않고, 左鋌右鋌無相觸,
치고 찌르고 뛰고 굴러 소름이 쫙 끼치누나. 擊刺跳躍紛駭矚.
회오리바람 소나기가 차가운 산에 몰아치듯, 颷風聚雨滿寒山,
붉은 번개 후른 서리 빈 골짝서 다투는 듯. 紫電靑霜鬪空谷.
놀란 기럭 높이 날아 돌아오지 않을 듯 하다가, 驚鴻遠飛疑不反,
성난 새매 내리덮쳐 쫓아가지 못할레라. 怒鶻回搏愁莫逐.
쨍그렁 칼 던지고 사뿐히 돌아서니, 鏗然擲地颯然歸,
호리호리한 허리는 처음 모습 그대로이네. 依舊腰支纖似束.
서라벌의 여악은 우리 나라 으뜸인데, 斯羅女樂冠東土,
황창무라 옛 곡조 예로부터 전해 오네. 黃昌舞譜傳自古.
백 사람이 칼춤 배워 겨우 하나 성공할 뿐, 百人學劍僅一成,
살찐 몸매 가진 자는 흔히 둔해 못한다네. 豊肌厚頰多鈍魯.
너 이제 젊은 나이 그 기에 절묘하니, 汝今靑年技絶妙,
옛날 소위 여중 호걸 오늘날에 보았는데, 古稱女俠今乃覩.
얼마나 많은 사람 너로 인해 애태웠나, 幾人由汝枉斷腸,
거센 바람 장막 안에 몰아친 걸 알 만하네. 已道狂風吹幕府.
이 작품에는 진주검무에 대한 종합적인 면모가 매우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서라벌의 여악은 우리 나라 으뜸인데, 황창무라 옛 곡조 예로부터 전해 오네.”라고 하여 진주검무의 연원을 밝힌 것을 비롯하여, 진주검무의 음악, 진주검무를 시작할 때의 상황, 특히 한창 춤이 어우러질 때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검무에서는 일반적으로 의상은 戰笠을 쓰고 戰服 혹은 快子에 남색 戰帶를 띤다. 그러나 교방가요에는 두 사람은 戎服에 갓, 두 사람은 黃衫을 입었다고 하며, 진주검무에서는 전립, 전복, 전대 이외에 色汗衫을 사용한다고 하였다. 이 시에 나타난 “진주성 성안 여인 꽃 같은 그 얼굴에, 군복으로 단장하니 영락없는 남자 모습.”이라 하여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지는 않으나, 군사들의 복장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보라 빛 쾌자에다 청전모 눌러 쓰고”라는 구절에는 비교적 구체적으로 옷의 종류와 빛깔 그리고 모자의 종류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리고 조선 중기 이후 검무에서 반주음악으로 연주되었던 곡은 순조 때는 「武寧之曲」, 즉 「鄕唐交奏」와 「凝祥之曲」 「多寶子令」이었고, 고종 때에도 「무녕지곡」 「향당교주」였다. 진주검무의 반주악은 「영상회상」 가운데 삼현 도드리, 타령, 빠른타령, 매우빠른타령, 다시 빠른타령 순으로 연주되고 있다고 한다. 여기에서는 이에 대해 자세히 언급되지는 않았으나, “계루고 한 소리에 풍악이 시작되니, 넓디넓은 좌중이 가을 물처럼 고요한데”라고 하여, 춤을 시작할 때 연주되었던 음악이 소개되고 있으며, “박자 소리 맞추어 사뿐사뿐 종종걸음, 쓸쓸히 물러가다 반가운 듯 돌아오네.”라는 구절에서는 박자에 맞추어 춤추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정재무도홀기에 전하는 내용을 보면 춤추는 모습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먼저 「무녕지곡」을 연주하면 악사가 칼을 들고 들어와 전중에 놓고 양편으로 나갔다가, 박을 치면 무원 네 사람이 두 사람씩 마주 서서 손을 벌려 들고 앞으로 가고 뒤로 물러나며 위치를 바꾸기도 하고 서로 등을 지기도 하며, 또 앞으로 향하여 춤추다가 상대하고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칼을 어른다음 집어들고 돌려 번득이며 손을 놀리며 일어나 다시 춤추다가 筵風臺 가락으로 일렬이 되어 전진하고 후퇴하여 박을 세 번 치면 춤과 음악이 끝난다고 한다. 다산의 이 작품에도 춤추는 동안의 동작과 과정이 가장 자세히 언급되고 있다. “박자 소리 맞추어 사뿐사뿐 종종걸음”에서부터 “호리호리한 허리는 처음 모습 그대로이네.”까지 상당히 긴 내용에 걸쳐 묘사되고 있다.
몸 굽혀 거꾸로 서서 한참 동안 춤추는데,
열 손가락 번득이니 뜬구름과 흡사하네.
한 칼은 땅에 두고 한 칼로 휘두르니,
푸른 뱀이 백 번이나 가슴을 휘감는 듯,
홀연히 쌍칼 잡자 사람 모습 사라지니,
삽시간에 구름 안개 허공에 피어났네.
전후 좌우 휘둘러도 칼끝 서로 닿지 않고,
치고 찌르고 뛰고 굴러 소름이 쫙 끼치누나.
위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특히 거꾸로 서서 추는 춤의 모습이 소개된 것은 특기할 것으로 생각되며, 이밖에도 돌고 찌르는 춤사위가 사실적으로 잘 묘사되어 있다.
이 시는 다산이 2차로 진주를 방문하였을 때에 지은 것이다. 이 작품과 관련하여 볼 수 있는 내용이 「촉석루에서 노닌 두 번째 기」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하는데 바로 이 때 지은 시가 이 작품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살펴 본 즉 옛날에는 요염하기가 꽃봉오리 같던 사람들이 지금은 살색이 누렇게 되고 피부는 주름이 잡혔으며, 옛날에 놀란 기러기와 날아가는 제비처럼 춤추던 사람들이 지금은 매우 굼뜨고 절름거려 제대로 걷지도 못하였고, 나의 귀밑머리도 또한 히끗히끗 하여졌다. 이 때에 한 늙은 기생이 나를 위해 칼을 뽑아들고 일어나 춤을 추었다. 춤이 끝나자 칼을 던지고 술어 부어 내 앞에 꿇어앉아 권하며 말하기를, “인생의 환락이 그 얼마나 되겠습니까? 공은 이 술을 드시고 여러 기생들을 위하여 시를 지어 오늘의 이 자리를 빛나게 하여 주십시오.” 하였다. 이 때 절도사 오공 역시 나를 권하여 기생에게 시 약간 수를 지어 줄 것을 청하고, 노래를 잘하는 자에게 명하여 그 시를 노래하도록 하였다.
내용은 비록 1차 방문했을 때 만났던 기생을 12년의 세월이 지난 다음 다시 보고는 그 변한 모습에 인생의 무상함을 말한 것에 중점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 때 늙은 기생이 일어나 검무를 추었다고 하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으며, 특히 절도사 오공의 권유로 기생에게 시를 주었고, 뿐만 아니라 그 시를 노래 잘하는 기생에게 노래하도록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시가 바로 촉석루에서 연회를 열고 검무를 보고 지었던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