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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 이야기

어설픈3단 2019. 1. 23. 14:30

시작 - 이야기


다산은 두 차례 진주를 방문하였다. 이 때에 남긴 자료는 1․2차 방문시에 각각 쓴 2편의 촉석루 관련 記文과 촉석루 및 남강에서 연유하면서 지은 몇 편의 시, 그리고 진주 주변의 유적에 관한 글이 전부이다.
이처럼 지금 남아전하는 자료가 양적으로 그다지 많은 편이 아니나, 다산의 진주에 대한 특별한 인식의 일단을 살펴보기에는 충분하다. 이들 가운데 몇 몇 자료는 진주의 문물과 유적, 그리고 진주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의기사기 (義妓祠記)」는 논개에 대한 인식이 비교적 자세히 잘 드러나 있으며, 특히 「칼춤 시를 지어 미인에게 주다 [舞劍篇贈美人]」은 진주 검무에 관한 자료로서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제 전하는 자료를 통하여 다산의 두 차례 방문이 언제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그 당시 다산의 진주에 대한 감회는 어떠하였는가, 그리고 진주의 구체적인 무엇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였던가 하는 문제에 대해 그 대략을 살펴보기로 한다.


2.1. 1․2차 晉州訪問

다산의 첫 번째 진주 나들이는 1780년(정조 4) 봄 그의 나이 19살 무렵, 그의 장인 洪和輔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진주에 주재하고 있을 때, 그를 찾아 진주에 옴으로 해서 이루어졌다. 첫 번째 나들이는 장인을 방문하기 위한 것이었던 만큼 아내와 함께 갔다. 「봄날 아내를 데리고 진주로 갔다. 화순을 떠나려면서 섭섭한 마음이 들어 짓다 [春日領內赴晉州, 將離和順, 悵然有作]」라는 시는 바로 이때 지은 것이다. 다산이 이때 진주에 오면서 지났던 구체적 노정은 알 수가 없으나, 이 시의 제목을 통하여 전라도 지방을 경유하면서 화순에까지 이르렀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아마도 아내와 함께 진주로 오는 도중에 유람 삼아 명승지 이곳저곳을 들러 보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시는 화순에 들렀다가 떠나오며 섭섭한 생각에 지은 것이라 했다.

호남의 나그네로 오래 있다가,            舊作湖南客,
이제는 대숲 정자 하직하누나.            今辭竹裏亭.
문 나서니 봄 들판 새파랗고요.            出門春野綠,
고개 돌리니 새벽 연기 푸르구나.            回首曉烟靑.
늘어선 산은 마치 길을 막는 듯,            列峀如遮路,
외론 솔은 뜨락에 그대로 있다.            孤松好在庭.
정든 조공 그 어찌 잊을 수 있나,            曺公那可忘,
말 멈추고 산가 문 두드린다네.            駐馬叩山扃.

이 내용을 보면 아내와 함께 전라도 지방을 유람하다가 화순을 떠나 진주로 넘어오며 그 감회를 “호남의 나그네로 오래 있었다”고 했으니, 호남 지방을 유람하며 꽤 오랜 시간을 보낸 것 같다. 다산의 시집에 「전주를 지나며 [過全州]」 「장성에 당도하여 [次長城]」 등의 시가 이 때 지어진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광주를 재차 지나가면서 [重過光州]」는 분명히 이 때에 지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밖의 전라도 다른 지방에 대한 시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런데 유독 화순을 떠나며 섭섭하다고 특별한 감회를 말한 까닭은 무엇인가? 생각컨대 화순에 이르렀을 때 급한 전갈을 받고 그 이전의 느슨했던 일정과는 달리 서둘러 그곳을 떠나왔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 때의 급한 전갈은 다름 아니라 그의 아버지가 예천부사로 발령을 받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다산이 이 제목에 보충하여 단 주석을 보면 “이른봄에 백씨께서 내 아내를 데리고 진주로 갔는데 2월에 洪日輔가 모시고 돌아왔었다. 이때 부친께서 예천군수로 전임되었으므로 나는 마침내 아내를 데리고 먼저 진주로 갔다. 장인 홍공께서 이때 영우절도사가 되어 진주에 계셨다.”라고 되어 있다. 
이처럼 아내와 함께 전라도 지방(그 가운데 화순 포함)을 경유하여 진주로 왔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내용은 「촉석루에서 연유할 때 지은 시의 서 [矗石樓讌游詩序]」의 내용과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이 기에서는 “상(정조) 즉위 4년(1780) 봄에 아버지가 예천군수로 옮겼는데, 장인 홍공(이름은 화보)이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진주에 주재하고 있었다. 내가 예천에 갔다가 홍공을 진주로 찾아가 뵈었다.”라고 하였다. 이에 의하면 다산은 예천에 갔다가 홍공을 진주로 찾아가 뵈었다는 것이니, 앞의 “나는 마침내 아내를 데리고 먼저 진주로 갔다”는 내용과 배치되는 것이다.
이는 추측컨대, 진주를 향하여 가다가 화순에 당도하였을 때, 부친이 예천군수로 부임했을 것이다. 따라서 다산은 부인을 진주에 데려다 주고 다시 예천에 가서 인사를 드리고 진주로 돌아왔을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예천으로 해서 진주로 오는 일정을 택하였을 것이다.
다산이 첫 번째로 진주를 방문했을 당시는 19세 때로 아버지가 예천의 임소에 있었는데, 그는 아직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단계로 그가 말한 대로 매우 한가한 시기였다. 그래서 한가하게 구경도 할 겸 전라도 길을 택하여 오다가 화순에서 아버지가 예천군수로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부인을 진주에 데려다 놓고 예천으로 갔다가 다시 진주로 돌아와 노닐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다산의 두 번째 진주 나들이는 첫 번째 나들이를 한 지 12년이 지난해인 1792년(정조 16년) 그의 나이 31살 때 이루어진다. 이 때는 그의 아버지가 진주목사로 임명되었고 자신은 때마침 산관으로 시간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천리 진주 길을 두 번이나 하게 되었던 당시의 감회를 그는 「촉석루에서 노닌 두 번째 기 [再游矗石樓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 나라는 넓이가 수천 리나 된다. 천리 밖에 있는 이름난 누각을 두 번이나 갈 수 있다면 다행스런 일이다. 그러나 사절로 지나가던 곳에 훗날 혹 귀양을 온다던가, 전에 한가하게 유람을 하던 곳에 훗날 혹 직임을 띠고 오는 것은, 비록 다시 온다고 하여도 별게 아닌 것이다.

넓은 땅덩어리 가운데 유독 진주와 인연이 있어 두 번이나 오게 된 것을 퍽이나 다행스럽게 여기고 있으며, 더구나 이곳이 천하에 이름난 고을이요 명승이라는 사실은 그를 더욱 설레게 했던 것이다. 다산은 특히 자신이 이곳을 찾았을 때 한가하게 노닐 수 있는 처지에 있었던 것에 큰 의미를 두었다. 얽매이는 바 없이 한가하게 물결을 즐기는 일이 가능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곳을 두 번 갈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해도, 벼슬살이를 위해서 간다든지 귀양살이를 하기 위해 간다고 하면 그리 좋을 것도 없는데, 자신은 지금 자유롭고 여유있게 이곳을 두 번 찾게 되어 더없이 좋다고 했다.

나는 홀로 이 누대와 인연이 있어 지난 경자년 봄에 장인 홍공이 진양 절도사가 되었을 때 일찍이 이 누대에 올라 한 번 술을 마신 적이 있다. 그후 12년이 지난봄에 아버지께서 진주목사가 되었다. 나는 때마침 한림으로 산관이 되었으므로 드디어 진주에 와서 아버님께 문안을 드리고 또 이 누대에 올랐다. 나는 두 차례 올 때마다 여유가 있고 한가하였으며 簿書로 인한 수고로움도 없었으므로, 마음을 놓고서 산수와 煙雲의 경치를 감상하게 되었으니 진실로 다행이 아닌가. 이에 옛날 함께 놀던 기녀와 악공을 불러 술과 고기를 주고 그들의 지난 생애를 물었다.

이는 다산이 당시의 처지와 심경을 진솔하게 나타낸 것이기도 하지만, 그가 이처럼 두 차례의 진주방문을 기분 좋게 여긴 또 하나의 까닭은 집안의 경사를 축하하기 위한 방문이었기 때문이다. 1차 방문 때도 장인이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있었기 때문인데, 2차 방문 때도 그의 아버지가 승진하여 이곳으로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산이 진주에 두 번 오게 되었던 때는 모두 그 자신이 말한 바와 같이 정신적인 여유가 있었고, 시간이 있었고 집안의 경사가 겹친 때였다. 그러므로 장인이나 아버지가 모두 즐겁게 맞이할 수 있었고, 그도 이를 흔쾌히 받아들일 처지에 있었다. 따라서 그의 두 차례 진주 장문은 매우 즐겁고 유쾌하게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다산의 진주에 대한 인식과 감회는 남다른 느낌을 드러내는 것일 가능성이 있다. 아버지와 장인이 벼슬을 했던 곳이고, 아버지가 돌아간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사암선생연보」에서 다산의 아버지가 진주목사로 돌아갔기 때문에 ‘진주공’이라고 불렀던 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